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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 유학기

[캄펜신학교](김지찬, 목신93년7월호 - 93년 당시 만 35세, 박사 학위 받던 그 해 1993년 기록)


학문성과 개혁주의 전통을 지닌 교회의 신학교

캄펜신학대학은 화란에서는 라이덴(Leiden), 흐로닝엔(Groningenen), 암스테르담(Amsterdam), 유트레크트(Utrecht)대학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갖춘 대학이다. 캄펜 대학은 엄격히 말하자면 1854년에 문을 열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이 해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1834년 교단분열이 있은 뒤 20년 동안 소규모로 사적인 근거에서
행해져 오던 교역자 양성이 공식적으로,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므로, 전신까지 따지자면 1854년 이전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대학의 시작과 발전은 화란 교회의 발전과 분열의 역사와 맞물려 있으므로, 후자를 살펴보기
전에는 전자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성주의와 권위주의의 반동, '아프스케이딩'
화란의 신교는 종교개혁 이후로 '네덜란드 개신교회(Nederlands Hervormde Kerk)'로 불려 왔는데, 화란
왕실이 오랫동안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 국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필자가 말머리에
언급한 캄펜보다 오래된 네 개의 대학들을 왕립 대학(rijkuniversiteit)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 대학들의
신학부가 지금까지 네덜란드 국교회의 교역자 양성기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로 점차 사변화 되고 지성주의화 되는 신학과 교회의 모습에 대한 반동으로 화란에서도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7∼18세기의 '나더르 레포르마치 (Nader Reformatie : 후속
종교 개혁) ' 운동은 당시에 유럽을 풍미하던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일종의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1834년에 있었던 헨드릭 드 콕(Hendrik de Cock)목사의 네덜란드 국교회에서의 '아프스케이딩(Aficheiding
: 분리 ) '도 이같은 정신을 계승하는 데서 발생한 교회 분열로 보아야 한다. 19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사변화
된 설교와 신학의 영향으로 일반 평신도들은 영적 양식을 점차 교회에서 얻기 힘들었으며, 계급적인 교회제도와
목사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이에 경건한 삶의 요구와 지성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드 콕 목사를 추종하여 '아프스케이딩'에 가담한 교회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1836년에는2만명
정도의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고, 제 1차 총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뒤 1869년에 교단명을 '기독교
Chelljk Gereformeerde Kerk)'라고 정하게 된다.
'아프스케이딩' 이후 1937년에 총회의 동의를 얻어 일부 목사들이 개인적으로 교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적인 기초 위에서 하는 교육은 한계가 있어서 1846년 이후 여러 총회에서 '우리 교회의 신학교(algemene
Theologische School onzer Kerk)'를 세우자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마침내 1854년 쯔볼레(Zwolle) 총회에서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학교를 세울 도시 선정에 들어갔다. 쯔볼레, 캄펜, 흐로닝엔의 세 도시 가운데
캄펜으로 결정이 어렵게 난 다음 1854년 12월 6일 개교식이 있었다. 교단 분열이 있은 뒤 12년만에 자체적인
신학 교육 기관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 학생은 40명, 교수는 네 명이었다. 이 기관의 처음의 시작이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의 눈에 얼마나 미미했는지는 당시 캄펜 신문인 캄페르 쿠란트(Kamper Courant)가
개교식에 대해 단지 3줄만 할애한 것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이 신문은 그 뒤 몇 년 동안이 신학교에
대해 진지하기는커녕 우스개 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교수가 그의 집 지하실에서 강의를 한
것을 두고는 이렇게 꼬집었다. "사실상 이 대학(hoge School)은 소학교(lagere school)에 지나지 않는다(대학을
hoge School이라 하는데 보통 높다는 의미에서 hoge란 형용사를 붙인다. 이와 반대되는 형용사인 lagere
를 붙이면 낮은 수준의 학교가 된다). 왜냐하면 교수들이 지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

성장 이후 개혁교회의 지도적 기관
이같이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한 캄펜 신학대학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개교 이후40년 동안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을 거듭하였으며, 화란 개혁교회의 지도적 기관으로서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사이에
1847년 이 교단 소속의 약3000명의 화란인들이 국교회의 박해와 경제적 궁핍을 피해 미국의 미시간과 아이오와
주로 이민을 가게 되어 거기서 새로운 교단을 만든다. 이 교단은 기독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es)로서
필자가 신학 석사학위를 한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가 이 교단 소속 신학교이다.
그러다가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국교회에서 제 2차 탈퇴가 있었다.
카이퍼는 이미 1880년에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미치게 하려면 단순히 교회를 위한 신학교로서는
불충분하고, 개혁주의 원칙에 따른 고등교육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확신에서 '자유 대학(Vrije Universiteit)
'을 암스테르담에 세웠다.
그는 교회는 국가와 돈과 교회 조직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우선 그는 수세기 동안
교회의 명목상의 수장인 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국가가 제공하는 돈이 아니라 믿음의
결실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에 의존해야 하므로 국가의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개혁되지 않은
기구로서의 교회 조직에서 해방되어 각 교회가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대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대학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이전부터 화란의 기존 대학들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성격을 잃고 단지 국가의 소유물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독교 대학-여기서 신학부는 없어서는 아니 될 부분을 차지하는데-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가 대학 이름을 '자유(vrij)'대학이라고 붙인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이런 카이퍼의 사상은 네덜란드국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1982년 국교회에서 2차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화란 교회사에선
이를 '돌레앙치(Doleantre : 분리, 반대)'라고 칭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제2차 탈퇴
그로부터 6년 후 먼저 탈퇴한 '아프스케이딩'교회와 '돌레앙치' 교회가 연합을 하게 되면서'화란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흔히 GKN으로 약칭)'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일차 탈퇴한
'아프스케이딩' 교회 가운데 일부가 연합을 반대하며 잔류하여 '기독 개혁교회 (Christelijke gereformeerie
kerken)'란 명칭을 고수하였는데, 지금도 이 교단이 운영하는 신학대학이 아펠도른(Appeldom)에 있다.
어찌되었든 지금까지도 자유 대학은 캄펜 신학대학과 함께 '화란 개혁교회'의 양대 교역자 양성 기관으로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 화란 개혁교회는 교역자 양성의 두 가지 모델, 즉 총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신학교만의 캄펜식과 기독교 대학 안의 신학부를 강조하는 자유 대학식 모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캄펜 신학대학의 역사로 다시 돌아와 보자. 캄펜 신학대학은 1896년에는 대학으로서 모든 조직과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대학(Hoge school)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39년의 일이다. 내용보다는 이름을 중요시하여, 학과의 수가종합대학의 수준만큼 많지 않은데도
대학교라 부르며, 총장이란 명칭을 선호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자못 다른 데가 있다. 그후 카이퍼는 1902년에
캄펜 신학교에서 강의하던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대가인 헤르만바빙크(Herman Bavink)를 삼고초려하여 자유
대학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반수에 가까운 캄펜 신학교 학생이 바빙크를 따라 자유 대학으로
이전하였다. 이것이 캄펜신학교가 당한 첫번째 위기였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는 이같은 위기 속에서 캄펜
신학교를 지지하였다. 개교 50주년을 맞는 1904년의 개교 50주년 기념일에 전국에서 1,500 명이나 되는
교회의 대표들이 캄펜을 찾아와 교회의 지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
대학교와의 관계는 잘 유지되었다.

두개의 화란 캄펜 신학교
그러나 이로부터 25년이 지난 1929년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75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에
수천 명이 참가하였으며,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교육부장관, 자유 대학 교수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포쳅스트룸대학의 판 바허닝언(Van Wageningen)교수, 영국 에딘버러 자유 교회 대학(FreechurchCollege)의
맥케이 (Mackay)교수 등이 참석할 정도로 지위가 향상되었다. 한 교수는75주년을 기념하면서 드디어 캄펜
신학교가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이 기간에 캄펜 신학대학은 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틈바구니에서 기독교의복음을 확고히 대변하는 화란 개혁교회의 고등 교육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또 한차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1945년 교단의 분열로 캄펜 시에 '화란 개혁파 신학
대학교'라는 동일한 명칭을 지닌 두 학교가 나란히 서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신의 신학, 특별히
일반은총, 영혼의 본질, 유아 세례, 중생 등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문맥에서 떨어진 성경본문을
증거 구절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점차 비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점에 대한비판은 제 2차 세계대전
전부터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심각한 의견 충돌이 1944년에 교단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 논쟁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조직 신학자 스킬더(K.Schilder) 교수와 신약 교수 흐레이다누스(S.Greijdanus)
교수가 총회의 결정으로 타의로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전체 교단의 십분의 일이 이들을 따랐다.
이들이 세운 교단은 기존 교단과 교단 명칭이 화란 개혁교회 (Geref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동일하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새 교단을 프레이허마크트(vrijgemaakt , '자유로워진')혹은 '31조파', 기존
교단을 시노달(synodaal;총회)이라고 부른다. 한국 실정에서 합동(개혁), 합동(호헌)등으로 표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어찌 되었든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스킬더 교수와 흐레이다누스 교수가 교단을 새로 세우고
캄펜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게 됨에 따라, 상당수의 학생이 이들을 따랐다. 이것이 캄펜 신학대학이 맞은
두 번째 위기였다.

심리학, 철학, 신학은 '넌센스 과목' 기피
어찌 되었든 인구 35,000의 작은 도시 캄펜에 화란 개혁파 교회들의 신학교가 두 개나 있게 된 것은 이같은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그후 이 두 학교는 각기 자기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가 이런 분리 역사로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서로 친밀한 관계는 없으나 이 두 학교는 각기 교단의 충실한 신학교로서 발전하였다.
한국에서 이 두 학교에서 공부한 이들의 숫자도 열댓명 이상 되는 것을 볼 때에 이 두 학교는 한국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1963년 김나지움(인문대학 교육을 받을 학생을 위한 고등학교)을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도 준비 과정을
이수하면 신학을 할 수 있는 길이 교육법 개정으로 열림에 따라 학생수가 늘게 되었으며, 1974년에는 왕립
대학교와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법이 또 개정됨에 따라 재정적 지원을 정부로부터 받게 되었다. 캄펜 대학은
현재도 화란 내에서는 유트레크트 대학 다음으로 신학생이 많다. 물론 최근에는 신학생수가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화란을 포함한 전체 유럽의 현상이다. 심리학, 철학, 신학을 이른바 '넌센스 과목'이라
하여 기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세속주의의 강한 영향으로 돈을 벌기 쉬운 과목(컴퓨터나 경제 계통의)을
전공하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신학생에게는 병역 면제의 특혜까지 주고 있다. 필자의 지도 교수에 따르면, 동네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면
늘상 주위에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신학을 하는
것은 큰 변화가 없으나,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약간 퇴조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편 1987년 말에는 직업을 위한 전문 고등교육기관은 대학(Hoge school)이라 하고, 학문적 기초를 강조하는
고등 교육기관은 대학교(Universiteit)로 부른다는 화란 교육법 개정에 따라 오직 신학부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캄펜 대학교라 부른다. 즉 목회자 후보생들을 학문적 기초 위에서 훈련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엄격히 말해 공식적인 명칭은 화란개혁교회 신학대학교(Theologische Universiteit va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화란에서도 흔히 캄펜 신학대학(THU-Kampen)이라고 줄여서 호칭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도 무방하다.

믿음 공동체 일원으로 신학에 임한다
그후 캄펜 신학교는 앞서 학교의 설립 배경과 역사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성장을 거듭해 오면서도
'교회의 신학교'로서 그 특징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캄펜은 자유 대학교의 신학부와 함께 화란개혁
교회(GKN)의 목회자 양성기관이나, 총회와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점에서는 자유 대학과는 다르다.
자유 대학은 교수를 총회에서 임명하지 않으나, 캄펜 대학은 총회가 교수를 임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캄펜 대학이 얼마나 교회의 신학교인가를 알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을 한국적인 상황에서 생각하여,
교권이 난무하고 총회가 좌지우지하는 학교로 오해해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교회의 신학교란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을 최우선하는 신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비평주의가 득세하면서 성경 연구에 도움을 주는 면도 있었으나, 주로 성경을 교회의
현장에서 격리시키고 교인의 일반적인 믿음과 큰 거리가 있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 연구가 일반세속 대학교의 학자들에 의해 주로 연구되는 것도 한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숫자적으로 볼 때에 교회와 연관된 학교보다는 일반 세속대학에 속해 있는 학자들이 훨씬 많으며, 이들은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자기가 믿는 대로 연구하고 있다. 이들은 객관성과 학문성이라는 미명 아래,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학문을 하고 있다. 그 동안에는 이것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해 무관심하던
이들도, 신학과 신앙의 괴리가 점점 넓어짐에 따라, 이 점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 예일대학의 차일즈(B.S..Chiles)에 의해 강조되는 '정경 연구 방법(canorucal
approach)'은 학문과 신앙간의 괴리, 성경 비평주의가 200년 동안 재구성해 놓은 본문과 믿음의 공동체에서
실제 사용하는 정경 본문간의 넘을 수 없는 간격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고 큰 호평을
받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캄펜 신학대학은 화란 개혁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학교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신학이란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확신인 때문이다.

바빙크와 리델보스가 있었던 곳
그렇다고 해서 캄펜을 학문성이 약한 교회 부설 신학교 정도로 오해해서는 아니된다. 일찌기 개혁파 조직신학의
거두인 바빙크가 20년간 교수로 봉직하였으며, 개혁파의 위대한 신약 학자인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평생을 이곳에서 가르쳤다는 사실 하나만을 보더라도 캄펜의 학문성은 그 어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비평주의 학계와의 대화와 비판을 수행해 내려면, 특별히 그것도 그동안 비평학계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독일의 신학 영향권 아래서 이일을 해내려면, 학문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랫동안 계몽주의를 경험해 온 유럽인들은, 특히 유럽 학자들은 엄격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성경 연구에 있어서도 이같은 객관성 추구에는 예외가 없다. 신학적 해석을 하려면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본문의 언어적 자료이든, 구조적 데이타이든, 비교 문헌학적 자료이든,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점검해 볼 수 있는 근거의 제시 없이, 너무 쉽게 신학적, 설교학적
해석을 도출해 내는 한국 신학생들에게는 이같은 요구가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우리의
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객관적 자료의 제시보다는 메시지나 케리그마를 이끌어 내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모든 성경 해석의 목표는 메시지나 케리그마의 도출에 있다고 믿고
있다. .단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학문을 한다면, 목사로서 성경 해석의 전문가가 되려면,
객관적인 자료나 검증 가능한 논거의 제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선 유럽쪽의 학교가 이런 훈련을
받는 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엄격한 객관적 근거 아래 신학적 해석을
물론 유럽과 미국 어느 쪽이 더 났다고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2년, 화란에서 4년을 공부한 필자로서는 양 시스템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미국은 폭넓은 과목의 개설과 다독, 코스 웍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체의 윤곽을 잡으려는 편이라면,
유럽은 한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면 그 깊이로 말미암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긴다는
접근 방식이라는 것이 필자가 받은 느낌이다. 물론 이같은 일반적 도식화가 모든 학교나 교수의 지도 방식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기에 실제로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문제는 자신의 공부 스타일이 어디와
잘 맞는지, 또 실제로 얼마만큼 스스로 공부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어디는 깊이가 없느니, 어디는
폭이 좁다느니라는 식으로 서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미국에서 유학한 분들과 유럽에서
공부한 분들이 서로 인정해 주며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다른 분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취할 때 한국 신학계의
앞날이 밝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유학의 가장 큰 교훈은 자신의 부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별히 사상과 생각의 전달수단인 언어를 모국인처럼 할 수가 없는 데서 마음껏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항상 불확실성 속에 살아야 하는(백 퍼센트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 불분명한 부분이
남게 마련임) 날들을 몇 년 이상하고서도 자기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자부하는 분들에게 유학을 헛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캄펜 신학교는 크게 다섯 개의 전공 학부로 나뉘어져 있다. (1)성경학부 :구약학과, 신약학과, 셈족어과(유대어와
고전적 유대주의포함); (2)조직신학부 : 윤리학과, 조직신학학과(철학 포함); (3) 교회 역사와 교회 정치
학부; (4)실천신학부; (5)선교학부. 각과에는 한 명의 교수와 2∼3명의 강사들이 있다. 독자들이 주지하시다시피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화란도 한국이나 미국에서처럼 부교수나 조교수라는 명칭은 없다. 오직
한 명의 교수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수는 매우 영예로운 직책이며, 교수가 아니고서는 박사학위 학생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에 교수라는 명칭이 박사라는 칭호보다 훨씬 영예로운 것이다. 캄펜 신학대학에는
현재 8명의 명예교수, 10명의 정교수, 20명의 강사(한국식으로는 부, 조교수)가 350명 가량의 학생을 지도하
고 있다. 교수 1인당 학생수는 10명으로 알찬 교육이 가능하다.

개혁주의 전통 위에 개방적인 학문성 추구
지면 관계상 각 학과에서 가르치는 교수를 일일이 소개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이름들이 생소하여 큰 도움이 안되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인물들은 이미 다 소천하였거나,
은퇴한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전공한 구약과 셈족어과의 교수를 소개하고, 다른 학교와의 방법론을
비교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전에 한마디로 다른 과의 교수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거의
모든 교수들이 개혁주의적 전통 위에서 개방적인 학문성을 추구하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십여년 동안 캄펜 대학의 셈족어과와 구약학과의 교수들과 제자들은 '캄펜학파(Kampen school)'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구조 분석 방법론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최근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서 세계 구약 학계의
비평과 인정을 받으려는 중에 있다. 한 방법론의 타당성과 장단점이 드러나려면 적어도 한 세대가 걸리기에
아직 섣부른 평가는 하기 힘든 형편이다. 특히 그 학파에 속해 있는 필자로서는 자칫하면 자기 선전이
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안고서라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 캄펜 대학과 화란의
구약학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상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 구조 분석 방법론은 필자의 지도 교수인 드모어(J.C.de Moor) 교수와 그 밑에서 시편을 연구한 판더루흐트(p.van
der Lugt)의 합작 연구 결과로 생겨났다. 시편을 정밀 연구한 결과 히브리 시가 마치 벽돌이 모여 건축물을
이루듯이 작은 단위들이 모여서 점차 큰 단위를 형성하면서 정교한 구조를 이루는데, 각 구조 단위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형식적인 지표들(formal indicators)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명령법, 호격, 강조 구문
등이 나오면 새로운 단위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지표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에 내용의 흐름이나, 주제의
발전을 고려에 넣는다. 단지 지금까지의 다른 구조 분석 방법과 다른 것은 형식적 지표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데 있다. 또한 최소 구조 단위부터 전체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조적 패턴들이 어떻게
확정되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방법론적 도구가 있다는 데 있다.

캄펜의 자랑 구조 분석 방법론
여기서 구조란 다른 방법론들에서처럼 주제구조(thematic structure)나 사건 전개 구조(plot structure)를
말하기보다는 본문의 언어구조를 언급하는 것이다. 본문의 메시지나 주제나 사건 전개는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되어 있기에 언어 분석 없이는 메시지나 주제나 사건 전개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의미는
단어나 글자들의 단순한 총합계가 아니다. 의미란 전체로서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와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즉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우리의 해석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 되기 쉬운 것이다.
결국 구조란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이다. 여기에 구조 분석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전제 아래에서
본문 전체를 가장 낮은 구조 단위인 콜론(행)부터 다음 구조 단위들인 절(verse), 스트로피(strophe),
캔티클(canticle)을 거쳐 최고구조 단위인 캔토(canto)에 이르기까지 분석하여 각 단위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해석한다.
이와 유사한 해석 방법-물론 구조 분석은 아니나 최종 본문 형태를 중요시하며, 문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는-이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이 학파를 암스테르담 학파(Amsterdam School)라 부르는데,
화란과 벨기에 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미국의 화란계 교회 등의 화란어권 신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학파이다.
이 학파는 최종 본문 형태를 무시하는 유럽 대부분의 신학교의 비평주의해석 방법들에 대항하여 최종 본문
형태가 의미를 지닌 고도의 문학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나름대로의 학파를 이루며 학계와 교회에
공헌을 하였다. 최근아 성장하는 몇몇 교회의 목회자가 이 방법론을 설교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 학파는 성경 본문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매우 크다. 즉 구약
성경의 대부분을 포로시대나 그 이후의 기자들의 문학적 상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최종 본문 형태 중시, 역사성 강조
이같은 암스테르담 학파와는 달리 캄펜에서는 최종 본문 형태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우가릿 문헌들과 고고학 발굴물들을 귀중한 자료로 삼으면서 고대이스라엘 내의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성경 본문이 어떤 의미로 전달이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원래 드 모어 교수는
우가릿어 전문가로서 더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 유행되는 구조 분석과 다른 것은
눈에 띄는 몇몇 핵심단어나 특징적인 문체적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전체를 동일한 깊이로
분석한다는 데 있다. 즉 컴퓨터의 도움으로 작은 불변화사(접속사, 전치사, 대명사, 접미사 등)의 반복까지도
점검한다. 본문의 의미는 눈에 띄는 몇몇 핵심단어나 두드러진 특징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본문 내의 평범해
보이는 모든 요소에 의해 전달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최근에는 캄펜 학파의 학자들은 '구약 내의 시와
산문' 프로젝트, 탈굼 콘코단스(Targum Concordance) 프로젝트, 역사적 주석 프로젝트, 구조분석 프로젝트
등의 다양한 연구 목표를 내걸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편 라이덴 대학은 전통적으로 본문 비평에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수리아역 성경인 페쉬타 연구소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편 흐로닝엔 대학은 고고학쪽에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자유 대학은 컴퓨터 언어학으로 히브리 본문의 구문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있다. 이렇듯 화란은 작은 나라이면서도
각 대학이 장점으로 내세우는 방법론과 학파가 있어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기 쉬울 뿐 아니라 최근 각 대학의
연구 조교들과 박사학위 과정 학생들의 정기적 모임이 있어 학문하는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캄펜 신학대학은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학 석사학위 이상을 소지한 자를 받아 주고 있다.
타국에서 신학을 전혀 공부한 적이 없는 경우는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한국이나 외국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획득한 사람은 소위 독토란두스(Doctorandus) 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화란 학생의 경우는
이미 이 과정을 들어오기 전에 최소한 4∼5년 신학을 공부한 셈이 된다. 최근 외국 학생의 입학조건이
약간씩 까다로워지고 있다. 영어와 독일어 능력을 알기 위해, 영어의 경우 토플(TOEFL)점수와 독일어의
경우 괴테 인스티튜트 수료증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독토란두스 과정은 석사과정으로써 강의를 듣지
않으며, 교수가 지정해 주는 책들 (한 과목당 영어 독일어 화란어 책들로 3,000∼5,000 페이지분량을 최소
10주 이상 읽은 다음, 교수와 구두시험을 보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 이 과정에 든 학생은 전공 하나에
부전공 둘을 택해야 하는데, 전공의 경우에는 3번, 부전공은 1번 이런 시험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모두
5번의 구두시험을 거치고 논문을 쓰면 독토란두스가 된다. 한국 유학생인 경우 1년 정도의 오리엔테이션과
화란어 습득기간을 합치면 3년이 걸린다.

금요일 오후 3시의 남다른 학위 예식
그후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면 독토란두스 과정을 화란서 마치거나 외국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어야 한다. 박사 과정 입학은 지도 교수의 허락과 경제적 능력을 보여주는 재정 보증서가 관건이다.
지도교수가 허락하면 정식으로 정교수들로 구성된 박사학위 위원회인 '요하네스 칼페인 아카데미(De Johannes
Calvin Academie) '에 정식으로 학위논문을 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해야 한다. 이에 대한 허락이
나면 평균 4년간 한 주제를 놓고 연구를 한 후 논문을 정식으로 출판하고 논문 방어식을 가져야 한다.

화란에서는 박사 학위 수여식이 매우 독특하기에 언급할 만하다. 한꺼번에 졸업식 날 다른 학위 수여자들과
함께 학위를 받는 미국이나, 개인적으로 지도 교수에게 학위증을 받는 독일과는 달리, 화란은 학위를 받는
사람 하나를 위해 날을 정하고 그 한사람에게 온갖 스포트라이트 비추는 예식을 거행한다는 점에서 아주
특이하다. 캄펜 신학교에서는 보통 금요일 3시쯤에 학위 논문 방어식과 수여식이 열린다. 학위 논문은
지도교수(promotor)와 부지도교수(copromoto.)와 부심(reftrencl)에 의해 구성되는 위원회의 통과를 거쳐야
한다. 논문의 주제에 따라 다르나 유럽의 일반적 경향과 마찬가지로 캄펜에서도 지도교수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논문을 다 쓴 다음 내용에 대한 지도교수의 허락이 나면, 부지도 교수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이때 부지도 교수가 수정하라는 요구가 있을 때에는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정정하거나 보충하여야
한다. 그리고는 부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주로 부지도 교수나 부심 중 한분 이상은 타 학교의 교수이어야
한다. 부심은 단지 논문이 박사학위를 받을 만한 수준인지를 결정하는 권한만 있을 뿐 논문 내용에 대해서는
수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세 교수의 허락이 나면 논문을 정식으로 출판해야 하며, 출판된 논문은 논문
방어식 한달 전에 정교수들로 구성된 박사 학위 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때 약 100권 정도 학교에 제출하게
되는데, 학교의 교수들과 이사, 화란과 유럽의 대학 도서관으로 보내진다.

100명 청중 앞에서 박사학위 위원회 열려
이때는 논문의 논지 가운데서 5∼6개를 간추려 따로 인쇄하여 삽입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화란어로
'스텔링언(stellingen)'이라 부른다. 여기에다 자기 전공 외의 각 분야에서 하나씩 자기 주장을 펴는 작은
명제를 넣도록 되어 있다. 필자처럼 구약을 전공한 경우는 신약, 조직신학, 교회사, 윤리학, 실천신학에서
하나씩 논쟁이 될 만한 이슈를 골라 자기 주장을 하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실천신학의 경우
"현재 화란의 일부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어린아이의 성찬 참여는 재고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이같이 자기 전공이외의 분야에 관해 자기 주장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학위의 명칭이 구약 박사가 아니라
'신학'박사이기에 방어자가 신학 전반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박사학위 논문은 전문적이어서 논문 방어식 때 지루할 수 있으므로, 이같은 논쟁거리를 제시하여
혹 교수들 가운데 반대 의견이 있으면 재미있는 논쟁을 야기시켜 분위기를 돋우는 데 이차적 이유가 있다고
한다. 더욱이 본인이 원하면 신학의 분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기가 조예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예를
들면 미술, 음악, 심지어는 재즈에 대해서조차도 자신의 박식함을 알릴 수 있는 명제를 한두 개 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 같은 명제를 싣기도 한다.
논문의 요지와 방어식 장소 등은 열흘 전쯤에 일반 신문에 서너 번 학교측 명의로 광고를 한다. 학위 논문이
미리 한달 전에 배포되기에 이를 읽고 이의나 질문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학교에 연락해 반대자가 될 수
있다. 또 학교에서 다른 곳의 특정 교수에게 반대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박사학위위원회는
방어식 일주일 전에 모여 비밀리에 논문을 평가하며, 질문자를 내정한다. 방어자는 물론 누가 어떤 질문을
할는지 알 수가 없다. 보통5∼6명의 교수가 질문자로 내정된다. 큰 홀에서 적어도 100명 이상의 일반 청중을
앞에 놓고 전문가들인 교수들의 다양한 질문을 준비 없이 받아넘겨야 한다.

개혁파 신학 산실에서 배운 신앙과 삶
처음에는 워밍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즉 첫 질문자의 질문은 미리 알고 대답을 준비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첫 질문자를 가리켜 '우호적 반대자(vriendelijk oponent)'라고 하는데, 이 질문자는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방어자가 지정하는 것이 상례이다. 보통 같은 학과를 전공한 박사급 인물 가운데서 선정하기
마련인데, 우호적 반대자는 질문할 내용을 방어자에게 일주일 전쯤 알려준다. 이 첫 질문자가 10분 정도
논문의 내용을 평가하고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난 후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방어자가 이를 받아 10분 정도
미리 작성한 답변을 읽으면서 워밍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나머지 40분 동안 5∼6명의 교수가 미리
예정된 순서대로 질문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방어자는 4∼5분 사이에 각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한다. 이러다 보면 교수들과 나란히 앉아 있던 직원이 "시간이 되었다"는 고함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멋진 지팡이로 마루 바닥을 치면, 교수와 방어자 사이에 열띤 논쟁이 진행중이라도 즉시에 중단해야 한다.
교수들은 밖의 소회의실로 나가 간단한 회의를 한 후 다시 입장하여 학장이 학위 수락 여부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면 지도교수가 나와 학위를 수여하고 치사와 유사한 연설을 하게 된다. 이런 예식은 학위 수여자
하나를 그날의 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멋진 턱시도를 입고 학위를 받은 후리셉션에서 축하하러 온
친구들과 교수들과 교인들의 축하를 받던 날이 먼 꿈길 같이 느껴지는 것은 모국의 다소 번잡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유럽을 관통하는 라인강의 지류인 에이설(I-Jssel)강 하구에 자리한 인구 3만 5천의 아담한 전원 도시,
고등학교 때 역사책에서만 대할 수 있었던 한자 동맹의 도시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중세풍의
역사 도시 캄펜에서 약 4년간 보냈던 유학 생활은 필자에게는 개혁파 신학의 산실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신앙과 삶과 신학을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특히 비평주의 학자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와 감정적인
비판만을 수행하기에 앞서, 객관적 자료와 절제된 감정으로 차분한 본문 해석을 수행하고 이를 근거로
비평학계와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은 필자의 학문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불과 서너 차례 밖에, 그것도 주로 신학적인 이유에서
분열을 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분열의 아픈 역사를 부끄러워하는 화란 신학자들의 모습에서, 두세 번의
분리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신학적 이유 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40여개가 넘는 장로교회를 만들고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바라보며 새로운 가르침을 받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유익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뜨거운 신앙이 없어 보이나 실제 생활 가운데서 절제와 근면의 삶을 살아가는
화란 개혁파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겉으로는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 같으나 이익과 물질 앞에서는 맥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반문하게 된 것은 한평생 잊지 못할 산 교훈이 될 것이다.

목회와 신학 1993년 7월호 (김지찬, 총신대교수)

 
이 글 적고 6년 후 1999년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를 저술.
화란 지도교수의 저술 내용을 많은 부분 활용한 책이지만, 그의 책으로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