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래서 나는 크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임금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렇게 인사의 말을 하였다. 27 ‘내가 임금님의 땅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고 길만 따라가겠습니다. 28 나는 임금님이 돈을 받고 파시는 음식만 먹고, 임금님이 돈을 받고 주시는 물만 마시겠습니다. 내가 걸어서 지나가게만 해 주십시오. 29 세이르에 사는 에사우의 자손들과 아르에 사는 모압인들이 나에게 해 주었듯이, 내가 요르단을 건너 주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30 그러나 헤스본 임금 시혼은 우리를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오늘 이처럼 그를 너희 손에 넘겨주시려고, 그의 영을 완고하게 하시고 그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31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이제부터 시혼과 그의 땅을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그 땅을 차지해 나가라.’
Dt 2:26–31.
모세와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헤스본 땅의 임금 시혼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단지 원하는 것은 땅을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시혼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당시 전쟁에서 상대를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는 이유도 있었고, 하나님께서그의 영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이 시혼 자신의 바라봄의 법칙 때문에 결정되었다.
시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침략할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그 것이 사실이 아님에도.
결국 자신의 바라봄 대로, 이스라엘은 헤스본 땅을 침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믿음도 바라봄의 법칙과 연관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그대로 되라고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을 인도하심을 바라보아야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라고 바라보아야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권은 자신을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바라봄의 법칙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과 판단력에 의지해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지지대가 없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확정 가운데 있던 것이 바라봄으로 결정된다.
처음부터 전자는 정확한 위치가 정해져있지 않았다고 말하면 옳은 설명이다.
실제 불확정성 원리는 '관측의 부정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위치라는 것이 애초에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를 예를 들어 정확히 설명하자면,
전자의 원래 위치가 정해져 있지만 측정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고 말하면 틀린 설명이고,
처음부터 전자는 정확한 위치가 정해져있지 않았다고 말하면 옳은 설명입니다.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서 불연속적이 원궤도를 그리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핵주위 전자를 확률 분포에 따라 나타나게 하는 전자구름모형이다.
전자의 위치는 확률 분포로 존재하다가 바라 볼 때 결정된다.
어떻게 바라보는 지가 결정에 영향일 미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Dt 29:29)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Lk 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