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5~6절
성경: 엡1:5-6절
1장 5~6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4~6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위대한 구속의 일을 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역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성자께서 행하시는 역할에 대하여 계속하여 보여 줄 것이며, 또한 뒤이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역할들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받아들여 주시는 것과 그것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에게 오는 모든 특권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위대한 주제의 원리들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원리들은 우리의 삶에 손해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원수들과 우리를 향하여 대적하는 사람들로 에워싸이게 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으며, 어려움이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러한 진술들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서”, “그를 인하여”,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계속하여 하는 것은 강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데 너무 열심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다 구속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아벨과 가인으로부터 두 부류로 나뉘어서 노아의 시대에도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확연하게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삼으실 때에도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백성이나 아들로서 표명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가르침도 하나님의 친 백성과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는 만인 구원설은 분명히 잘못된 이론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권세를 소유하신 분으로서 만일 그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중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행하신 모든 것의 결과로 인하여 가능해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한 아들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나와의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즐거워하고 있는 한에서 우리의 아들 됨과 그리스도의 아들 됨 사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방식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한 위격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내적 성품으로서 존재하는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로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됨의 자격을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니 우리는 신적인 존재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적인 성품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간들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본체”시며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로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기는 하였지만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내적 성품으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성도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특이한 방식으로 그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가운데서 이루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녀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도 특권을 누리고, 하늘에서도 같은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같은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은 단순히 타락이나 죄의 영향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일차적인 면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의하여 죄와 타락의 영향들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상의 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아담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로마서 5장에 있는 논증을 비교하여 봄으로 밝혀집니다. 우리는 본질상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은 무죄한 상태에서 완전하게 창조되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만물의 영장이었지만 여전히 피조물로서, 그가 아무리 높아지고 아무리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온전하였고, 무죄하였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지만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사람으로(고전15:47)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지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 특권을 받아 아담이 누리지 못하였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도록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있어 우리는 아담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른 것입니다. 아담은 완전하였지만 타락하고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단코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락하여 버림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이렇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인하여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들을 다 없게 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위까지도 더 높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복락들이 우리에게 회복되어 되돌려졌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보다 더한 것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심각하고 무서운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요,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고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어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지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누리게 된 이 새로운 관계에서 아담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모든 특권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성경: 엡1:5절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앞에서 구원의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조건으로 회복시키고,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는 우리를 보다 더 영광스러운 지점으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되었다는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진술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높은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최고의 영광스러운 관점을 가지고 일종의 플랫폼에 도달한 것처럼 말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떨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지옥의 형벌 밖에는 받을 것이 없었던 위치에 있던 자들 가운데에서 얼마를 하나님 자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이었다는 말로 바꾸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타락한 인류 중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서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이요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받아 누리게 될 사람들을 택하시고 선별하시어 그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조치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시는 구속의 사역일 것인데, 죄인 된 인간을 그저 용서하시고 하늘나라에 옮겨 놓으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 놓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거룩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덧입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선택받은 성도들만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영광스러운 위치로 신분의 승격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렇듯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목적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이 장면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살펴보겠는데, 헬라어 원어를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우리를 예정하사 자녀들로 받아들여지게 하셨으니”라는 식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로마법에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로마법에서는 양자가 되면 그 양자가 된 사람이 그를 받아들인 사람의 이름을 따고 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법적으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는데, 양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권한과 특권을 가지게 되고,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성품과 혈통에 관계없이 아버지의 지위에 관한 특권들을 모두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자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들이 되어서 새로운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양자로 받아들여짐에 의해서 성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되어,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고, 위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양자”라는 용어가 전달하는 개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성품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 않고 전적이고 법적으로,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지위와 신분으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양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새롭게 관계를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아들로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양자로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에 속한 특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누리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격상된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너무도 초라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는 갈라디아서 4:1~5 의 진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에서 보듯이 진정한 자녀임에도 아직 성장하지 않아 아버지의 정한 때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정한 때가 이르기 까지도 그의 성품과 혈통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가진 지위와 법적인 신분에 있어서는 달라진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구속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런 특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세상의 것들은 온통 부패한 것뿐이라서 세상의 영광들도 썩어지는 영광일 뿐이며,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은 진정한 명예와 부요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하늘에 속한 어떠한 것을 말한다 해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하나의 목수로밖에 보지 않았고, 그 안에 있는 영광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알았는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한 요한처럼, 그리스도께서 비록 종의 형체를 입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비쳐 나오는 영광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산상에서 목격하였는데,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영광도 그러한 영광과 유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영광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은 특권들 중에 참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은?
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하나님 아들 자신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에게 있던 동일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도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최종적인 구속을 완성 받게 될 소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받게 될 것이며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벧후3:13)
④ 성도가 세상을 판단 할 것이며 심지어 천사를 판단 할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6:2~3)
우리는 천사들보다 더 높아 모든 하나님의 천사들을 판단하여 그들의 빛 됨과 순전함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엡1:6절(1)
1장 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바람이지만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며 인간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반응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하여 이 진리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는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째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의 뒤에 있는 위대한 동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궁극적인 목적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의 위대한 목적으로부터 나온 모든 복락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기 위하여 선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비춰 볼 때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하여 다룰 때에는 언제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이 성경의 주제가 됩니다. 이 사건은 세상에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일에 대하여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는 합니까?
우리가 주말이나 어느 특별한 날에 야구나 축구 경기장에서 흥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듣게 됩니다. 그리고 콘서트와 같은 집회장소에서 인기 있는 연예인에 대하여 열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즐거운 일을 만나게 될 때에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열심 있는 반응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특별한 연예인들이나, 특정한 사람들에 관하여 반응하여 말하고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에 열심인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할 때에 그런 반응들을 보이는지는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오늘날 교회 밖에 있는 대 다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꺼려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준 인상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일에 실패한데 원인이 있는데, 우리는 사실 그 놀라운 일에 주인공이 되시는 분에 대한 찬미를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해야 하는 바를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높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어떤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종교와 차이를 느끼지 못하여 그러한 자리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첫째 되고 가장 위대한 진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다는 것으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은 구약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을 나타낼 때 “여호와의 영광”으로 쓰였던 말임을 발견합니다.
이제 천군천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러한 다음에야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구원이 언급되는 순간에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말하여 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여야 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 할 때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자 하는 그런 감정으로 넘쳐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찬양하고자 하는 인식이 듭니까? 우리는 어떤 잘못된 행위를 한 것만을 가지고, 또 그 죄의 열매만을 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진면목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하는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니, 즉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라는 소요리 문답의 제 일문에서 말하는 대로입니다. 우리는 과학자의 관점을 가지고 하늘을 쳐다보며 별들을 생각하지만, 시편 기자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들을 지으시고 그 별들을 질서로 지어 놓으신 분이시며, 모든 행성들이 운행하는 길을 정해 놓으신 분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19:1)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자연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인하여 눈이 멀어서 이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는 역사를 통하여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깊은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계획과 야망, 그리고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하여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시며, 그 모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노아의 홍수,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홍해가 갈라지는 것, 요단을 가르고 건너는 일,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일들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장 충만하게 보는 것도 구속 안에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꿈을 계획하고 지상 낙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지만 현대 세계가 증거하는 바와 같이 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을 고안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사단의 능력과 사망의 권능을 정복하시고 이기심으로 우리가 누릴 복락을 방해하는 모든 다른 것들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나타나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요구들을 만족시켜 드려야 했기 때문이며, 그 자격이 되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의롭다 하신 선언을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롬3:25~26)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영광을 보는 것은 그 은혜 가운데서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내진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16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들리게 하라.”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빼 놓고는 이 사람들에 관하여 설명할 방법이 없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살고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진리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들을 보아야 하는데, 사도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열납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누가복음 1:28에서 사용한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함께 하시 도다.”라는 말씀은 본문의 뜻과 같이 사용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하시는 은총을 크게 베푸신 것을 아노라” 이것은 사도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가 되는데, 그는 하늘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향하여 하였던 말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똑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게 은총을 입은 사람아”란 말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여자들 중에 선택하사 그의 아들을 나게 하시려 하셨다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태에 들어가서 그녀에게서 나게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우리에 관하여도 유사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들로 받아들여지기로 예정되었고, 이제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7에서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육신적으로 마리아에게 들어가셨듯이 그는 영적으로 그의 자녀들인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어 우리는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크게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 누리는 이 모든 특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엡1:6절(2)
1장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이제 6절에 있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세 마디로 된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사도는 우리가 복음을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의 차원에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짐”을 받은 결과로 우리가 누릴 특이한 특권들을 6절에서 상기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그냥 “그리스도”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그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에게 그의 깊은 지혜를 결국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을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려고 한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인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마3:17), 그리고 변화산상에서(마17:5),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악한 농부의 비유(마21:37) 속에서도 이 말을 쓰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본체에 있어서 분리 될 수 없으신 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시는”이라는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본체 중의 본체라는 것을 밝혀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아들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제 세상은 우리 안에 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어떤 것을 세상이 우리로 말미암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즉 그 아들의 인격 속에서 충만하고 충일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광채와 위엄의 충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밖으로 비취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주시는 사랑은 시작이 없습니다. 그 아들은 그 사랑하심을 받은 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누리고 계셨던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을 모두 쏟아 부음을 받은 유별나신 분으로서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만한 다른 어떠한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그것만큼 더 훌륭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 그렇듯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분량을 측량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에 비춰 볼 때 비로소 알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섭게 뒤 틀려 꼬인 사람들을 위하여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저질렀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그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내려다보시는 분이시며,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찰하시고 주목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부모들이 체험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한 부모로서 자녀를 생명이 위태로운 곳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그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고, 그 아들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폭풍을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애타는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자기의 아들을 생각 하고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한정하게 확대하여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개념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치는 것을 보셨으며, 그를 비웃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세상을 단 한 순간에 끝장 내 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이 자신의 아들,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가 당하는 모든 것들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그 분이 자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고, 그들의 멸시를 받고, 조롱을 당하고, 미워하심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고뇌와 수치를 다 생각하여 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가 자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이 그렇게 함부로 하는데도 불구하고 참으시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멸시와 핍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의 가장 절정에 이른 독백은 어떤 인간도 이를 수 없는 주님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서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버리고, 그를 따르며,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제자들까지도 그를 버려두고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그 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여 오셨던 그분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아버지와 얼굴과 미소까지도 볼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어떠한 것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거기서 물러서셨더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었고, 우리는 거듭난 자녀들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자”가 그 괴로움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와의 관계를 다루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는 것에 관하여 다루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더 높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하심을 받는 것만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7:23에 있는 주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나오는 말에서 확증할 수가 있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친밀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지위와 신분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가 법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 보다 더 큰 것, 즉 아버지께서는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 엄청난 일이지만 사실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입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