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관한여
선교에서는 '이거다'라고 말하기 모호한 일들이 많다.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살기 위해 이 일을 하는지? 선교지에서 회심한 성도를 만들고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 하는 일인지를 가를 수 없는 모호성이 why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하기도 한다.
선교 사역을 시작하는 첫 걸음을 뗄 때는 사역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그 어떤 선교사도 모른다. 그런데 사역의 한 단계를 다 마치고, 과정을 글로 정리한 뒤 성경적 원리와 잘 어울렸는가를 판단해보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는 하나님의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솜씨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절대적인 계획이 있고 그것을 선교사가 조금씩 발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인간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대상이 있을 때, 타겟 부족 주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지만 저 멀리서 바다로부터 서서히 물이 차올라, 어느덧 타겟 부족 주위를 물이 감싸 결국 부족이 가지고 있던 껍질을 스스로 녹인다. 선교는 그렇게 진보를 이룬다.
현대 선교는 소수의 탁월한 선교사가 큰 몫을 하지 않고, 그 주위의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느슨한 '원 팀'으로서 활동한다. 선교사가 하는 사역 중 도드라져 보이는 꼭짓점이 한둘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일조차 많은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난 선교사로서 거대한 엔진이 되길 원치 아니하고 엔진의 작은 톱니바퀴로서 기능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여러 톱니바퀴들이 모여 만든 하나님의 선교라는 엔진이 잘 작동하고 있으므로, 나는 엔진 어딘가에서 순간순간에 감격할 뿐이다. 항상 선교하는 행위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선교를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나'로부터 하나님의 큰 일에 몰입하는 아름답고 고귀한 순간이다.
성경을 번역하는 중 어떤 구절들은 추상적이고 난해해 개념의 공유가 어렵다. 그러나 이제 점점 선교지의 현지인들과 추상성과 난해성을 공유한다. 번역하는 부족들도 공용어를 사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터넷 공간에서친구가 되고 또 친분이 쌓이면 '요즘 나는 이런 걸 생각하고 있다'고 공유한다. 문제를 공유하면 미스터리한 일은 여기서부터 벌어진다. 모든 번역자들이 풀지 못했던 문제가, 같은 현지인 2인, 3인일 때는 풀리는 경우가 많다. 정확히 누가 이걸 풀었는지를 판단해보면 그걸 모른다. 문제가 '뿅' 하고 풀린다는 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화학작용이다. 누가 번역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인터넷을 이용한 연결을 통한 두 번째 단계의 화학작용은 이전의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이다.
대망까진 아니고 소망(小望)이 있다.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할 것. 그리고 선교를 향한 열정을 끝까지 유지할 것. 아직 50세여서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다는 걸 알지만, 날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분명한 팩트는 '나는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막이 내리기 전에 이 시대와 다음 세대가 사용할 새로운 선교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미전도 종족에서 그 열매들을 보는 것.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와 나를 통해 일하신 놀라인 일들이 편지이자 유산처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충족감을 없을 것만 같다. 선교사의 진짜 기쁨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